담헌 이하곤의 정자기행 담양 소쇄원과 대봉대
(사진: 박주성 박사) |
“소쇄원이라는 유명한 이름처럼(瀟灑名亭不負名) 좌정하면 마음 절로 맑아지네(坐來幽意自然生), 울창한 노송은 항상 옛 색을 띄고(老松漠漠常古色), 들려오는 대바람 소리 속세 정취 아닐세(脩竹蕭蕭非世情)”.
이는 담헌(湛軒) 이하곤(李夏坤·1677-1724)이 소쇄원에 들러 쓴 시다.
선비들은 정원을 통해 수심양성과 성리학적 정신세계를 산수화석(山水花石)으로 표현했다. 이 조영이념 속에는 주제, 동정, 음양, 허실, 조화, 육합, 양택지리(陽宅地理) 등이 포함된다. 그것은 마치 조물주가 세상을 설계하고 기운을 불어넣는 작업과 같다. 정원의 목적은 광풍제월(光風霽月)과 신민(新民)이었으며 문인집회를 통해 상호 인격을 연마했다. 한국의 이러한 대표적인 정원이 바로 2008년 명승 제40호가 된 소쇄원(瀟灑園)이다. 그리고 소쇄원의 대봉대(待鳳臺)는 광풍각(光風閣)과 더불어 소쇄원의 가장 상징적인 곳으로 앞에 벽오동을 심어 그 의미를 강조했다. 대봉대에 온 봉과 같은 객은 좌측의 제월당과 광풍각을 보며 주인을 기다린다.
기묘사림이었던 양산보(梁山甫, 1503-1557)는 15세 되던 해에 요순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주장하던 조광조(1482-1519)의 제자가 되어 소학을 배웠으며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으로 현량과에 천거되었다. 소학은 주자가 만든 책으로 고려 말에 성리학과 함께 전래 되었는데 김굉필에게 사사 받은 조광조는 소학을 중시하였다. 소학은 내편(內篇)의 입교(立敎), 명륜(明倫), 경신(敬身), 계고(稽古) 4편과 외편(外篇)의 가언(嘉言), 선행(善行) 2편 총 6편으로 구성돼 있다. 이 소학은 소 주역이라는 중용의 핵심 구절 즉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부터 시작한다. 소학은 마음의 정체를 드러내 밝힘과 동시에 마음과 주위, 마음과 사람 간의 마땅해야 할 것을 열거했다. 대표적인 것이 쇄소응대진퇴지절(灑掃應對進退之節)과 애친경장융사친우지도(愛親敬長隆師親友之道)다.
기묘사화 이후 임억령, 유성춘, 박상, 고운, 양팽손 등 살아남은 사림들은 전국 각지에 낙향하여 세거했다. 양팽손은 능주에 학포당(學圃堂)을, 김안국은 이천에 은일재(隱逸齋)를, 유성춘은 해남에 서재(書齋)를 짓고 그 지역의 대표 지식인들이 됐다. 양팽손도 1519년 17세에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죽자 담양에 은거하면서 1520년대 중반부터 20여 년에 걸쳐 소쇄원을 건립했다. 원래는 소쇄정이었으나 1536년 소쇄원으로 바꾸었는데 탁본 기록에 의하면 소쇄원은 약 9천평 정도로 지금보다 컸고 정자도 10채가 넘었다고 한다. 더불어 유명해진 소쇄원에는 하서 김인후, 임억령 등 많은 선인들의 발자취와 이야기가 서려있다.
조선 4대 장서가이자 문화와 예술을 사랑한 담헌 역시 이곳에 들렀다. 담헌은 1722년 11월 6일 이후 강진에 유배 온 장인을 찾아뵙고 귀로에 강진 백운동 정원, 영암, 장흥, 남평, 능주, 적벽을 거쳐 소쇄원에 당도했다. 그는 ‘소쇄원은 품격이 기묘(瀟灑品格妙)하다’고 시에 적고 있다. 12월 6일 소쇄원에 들린 담헌은 소새옹과 하서(河西)의 인연을 적시하며 사실주의자답게 정원을 자세하게 묘사했다. 그는 주인 익룡과 종제들을 만나 소쇄원 시권을 열람하고 자신의 시와 성명을 적자 모두 놀라며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을 통해 이름을 들은 지 오래라며 반가워하였던 이야기도 남유록에 적고 있다. 이들과 환담한 담헌은 다음 시를 남기며 길을 떠났다.
“사람은 가고 정자는 비어(人去亭空在), 손님이 정자의 주인 되건만(賓來卽主人), 샘물소리는 오히려 태고를 간직하였고(泉聲猶太古), 대나무색은 스스로 변함없이 푸르네(竹色自天眞).”